2·26 사건
| 날짜 | 1936년 2월 26 ~ 27일 |
|---|---|
| 시간 | 새벽 |
| 위치 | 나가다정 |
| 원인 | 일본 육군 내부의 황도파와 통제파의 파벌 싸움 중신, 군벌, 재벌, 정쟁을 일삼던 정당정치・정치가들에 대한 실망과 증오[1] |
| 표적 | 임금의 옆에 들러붙은 간신으로 간주한 중신(오카다 게이스케, 사이토 마코토, 다카하시 고레키요, 스즈키 간타로, 와타나베 조타로, 마키노 노부아키) ・ 국회의사당이나 경시청, 수상 관저 등 수도 기능의 요충을 담당하는 시설들 |
| 결과 | 쇼와 천황의 원대복귀 명령 및 계엄령 선포에 따른 명분 상실 |
| 사망자 | 경찰관 5명 순직, 1명 중상 |
| 부상자 |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 시종장(侍従長) |
| 조사 | 주모자 재판 교수형 또는 금고(禁錮) |
| 피의자 | 노나카 시로(野中四郎), 안도 데루조(安藤輝三), 구리하라 야스히데(栗原安秀), 고다 기요사다(香田清貞), 이소베 아사이치(磯部浅一), 무라나카 다카시(村中孝次), 하야시 하치로(林八郎), 이케다 도시히코(池田俊彦) 외 |



2·26 사건(일본어:
황도파(皇道派)의 영향을 받은 일본 육군(陸軍)의 청년 장교들이 1,483명의 하사관・병사를 거느리고 봉기하여 당시 정부 요인을 습격하는 동시에 나가타 정(永田町)이나 가스미가세키(霞ヶ関) 등 일대를 점령하였고, 쇼와 천황(昭和天皇)은 이에 격노하였다. 최종적으로 청년 장교들은 하사관 및 병들을 원내로 복귀시키고, 자결한 일부를 제외하고 투항, 구속되었다.
이 사건의 결과로 오카다 내각(岡田内閣)이 총사퇴하고, 그 후계로 히로타 내각(廣田内閣)이 출범, 사상범보호관찰법(思想犯保護観察法)을 성립시켰다.
개요
쇼와 초기부터, 일본 육군 안에는 통제파(統制派)와 황도파(皇道派)라는 사상을 달리하는 두 보수적 파벌이 대립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 해군 안에도 함대파(艦隊派)와 조약파(条約派)가 대립하고 있었다후술). 통제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나가타 데쓰잔(永田鉄山) 등은 1926년(다이쇼 15년/쇼와 원년)에는 제1차 와카즈키 내각(第1次若槻内閣)에서 세계 각국의 국가총동원법(国家総動員法) 연구를 하고 있던[2] 나가타는 당시에는 육군 보병 중좌(中佐)였다.[2] 훗날 일본 제국의 수상이 되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도 통제파이다.
한편 그후의 이누카이 내각(犬養内閣)은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육군대장(陸軍大将) 겸 육군대신(陸軍大臣)이나 교육총감(教育総監) 마사키 진자부로(真崎甚三郎) 육군대장, 육군 군인 겸 귀족원(貴族院) 의원인 기쿠치 다케오(菊池武夫)를 중심으로, 소련과의 대립을 지향하던 황도파를 우대한다. 황도파의 영향을 받은 일부 청년 장교(20대의 대위부터 소위가 중심) 가운데는 자신들이 당시의 '썩어빠진 정치 실태'와 '농촌의 곤궁한 현실'의 요인으로 여겨지던 구태한 원로(元老) 중신들을 제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과 같은 쇼와 유신(昭和維新), 즉 '천황 폐하의 친정(親政)'이 실현된다면 여러 정치 문제(정·재계의 부정부패나 농촌의 곤궁 등)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쇼와 유신, 존황참간'(昭和維新, 尊皇斬奸) 즉 이 손으로 쇼와 유신을 결행하여 천황을 받들어 간신을 베어 없애자는 등의 표어를 내거는 자도 있었다.[b]
그러나 만주사변(満洲事変)에 이어 5.15 사건 이후 사이토 내각(斎藤内閣)은 청년 장교들의 이러한 운동을 '脅しが効く存在'로 암암리에 이용하는 한편, 관료적・입법적인 절차를 거쳐 군확(軍拡)과 총력전(総力戦)을 꾀하던 통제파(統制派, 소련 기습을 회피하는 남진정책)을 우대하였다. 행정에서도 1934년에는 사법성(司法省)이 나치 헌법을 선전하기 시작,[3] 일본 제국변호사회(帝国弁護士会)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탈퇴 지지 성명을 내고,[4] 육군대신으로 통제파의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郎) 육군대장이 취임, 황도파를 배제하기 시작했다. 1935년 7월, 황도파 중진인 마사키 진자부로가 사직 권고를 받기에 이른 것은 당시 일본 육군성(陸軍省) 안에 육군 중좌(中佐) 아이자와 사부로(相沢三郎)에 의한 이른바 '아이자와 사건'(相沢事件)이 발생하고, 당시 육군 군무국장(軍務局長)으로 있던 통제파 주도자 나가타 데쓰잔이 사망한다. 오카다 내각이나 하야시 등 일본 육군 수뇌부에서는 이에 대해 황도파 장교가 다수 소속되어 있던 제1사단(第一師団)의 만주 파견을 결정하였다.
황도파 청년 장교들은 그 만주 파견 전, 1936년(쇼와 11년) 2월 26일 새벽, 부하인 하사관 및 병사 1,483명을 이끌고 결기하였다. 결기 장교들은 보병 제1연대(歩兵第1連隊), 보병 제3연대(歩兵第3連隊), 근위보병 제3연대(近衛歩兵第3連隊), 야전중포병 제7연대(野戦重砲兵第7連隊) 등 부대 일부를 지휘하여,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내각총리대신(内閣総理大臣),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 시종장(侍従長), 사이토 마코토(斎藤実) 내대신(内大臣),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清) 대장대신(大蔵大臣), 와타나베 조타로(渡辺錠太郎) 교육총감(教育総監),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顕) 전 내대신을 습격, 수상 관저(首相官邸), 경시청(警視庁), 내무대신 관저, 육군성(陸軍省), 참모본부(参謀本部), 육군대신 관저(陸軍大臣官邸), 도쿄 마이니치 신문(東京朝日新聞)을 점거했다. 전 수상 겸 해군 군인 사이토 마코토는 살해되었으나, 그 후임인 오카다 게이스케 수상은 별 상처를 입지 않았다.
나아가 장교들은 林銑十郎 등 육군 수뇌부를 통해 쇼와 천황(昭和天皇)에게 '쇼와 유신의 실현'을 호소하였으나, 쇼와 천황은 정부 요인들이 암살당한 것에 격노하여 이를 거부하였고, 심지어 쇼와 천황 자신이 몸소 근위사단(近衛師団)을 이끌고 저들을 진압하겠다는 의향까지 보였다. 사건 발생 당초에는 청년 장교들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고 쇼와 천황에게도 "젊은이들이 폐하에 대한 충성심으로 벌인 일"이라며 변호하기도 했던 일본 육군 수뇌부도 그들을 '반란군'으로써 무장 진압할 것을 결정, 이들을 포위하고 투항을 종용하게 되었다.
반란 장교들은 하사관, 병사들을 원대로 복귀시키고 일부는 자결하였으나, 대부분의 장교는 추항하여 법정 투쟁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 참작되는 일은 없었고, 히로타 내각(廣田内閣)의 육군대신이 된 데라우치 슈이치(寺内寿一) 아래에서 일심제(一審制) 재판에 의해 사건의 주모자 및 장교들의 사상 기반을 계몽한 민간사상가 기타 잇키(北一輝) 등이 총살형에 처해졌다. 이로써 쿠데타를 목표로 하는 세력은 일본 육군 내에서 일소되었다.
사건 이후 한동안은 이 사건을 불상사건(일본어: 不祥事件), 또는 제도불상사건(일본어: 帝都不祥事件)[5]이라고도 불렀다. 사건이 일어났던 날짜를 한자가 아닌 숫자로 표기하여 226事件, 2・26事件이라고도 쓴다.
주요 관계자
반란군
주모자
-
노나카 시로 육군 보병대위
-
고다 기요사다 육군 보병대위
-
안도 데루조 육군 보병대위
-
구리하라 야스히데 육군 보병중위
-
이소베 아사이치 전 육군 일등주계
- 노나카 시로(野中四郎) - 일본 육군 보병대위(歩兵大尉) ・ 보병 제3연대(歩兵第3連隊) 제7중대장(第7中隊長)
- 고다 기요사다(香田清貞) - 일본 육군 보병대위 ・ 보병 제1여단 부관(第1旅団副官)
- 안도 데루조(安藤輝三) - 일본 육군 보병대위 ・ 보병 제3연대(歩兵第3連隊) 제6중대장(第6中隊長)
- 고노 히로시(河野壽) - 일본 육군 항공병대위(航空兵大尉) ・ 도코로자와 육군비행학교(所沢陸軍飛行学校) 조종학생(操縦学生)
- 구리하라 야스히데(栗原安秀) - 육군 보병중위 ・ 보병제1연대 부(歩兵第1連隊附)
- 무라나카 다카시(村中孝次) - 전 육군 보병대위
- 이소베 아사이치(磯部浅一) - 전 육군 일등주계(陸軍一等主計)
참가자(군중지휘 등)
피해자
사망
- 마쓰오 덴조(松尾伝蔵) † - 내각촉탁(内閣嘱託),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사무취급(秘書官事務取扱) ・ 육군보병대좌(陸軍歩兵大佐)
-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清) † - 대장대신(大蔵大臣). 전 내각총리대신
- 사이토 마코토(斎藤実) † - 내대신(内大臣), 전 내각총리대신
- 와타나베 조타로(渡辺錠太郎) † - 육군교육총감 ・ 육군대장.
- 경찰관 5명 †
중상
-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 - 시종장(侍従長)
- 다른 경찰관 외 부상자 다수
기타
-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 내각총리대신, 해군대장. 반란군의 살해 대상으로 수상 관저에서 습격당했으나, 습격조가 마쓰오 덴조를 오카다로 오인하고 살해, 오카다는 도망칠 수 있었다.
배경
육군 고급간부의 파벌 싸움:황도파와 통제파

일본 육군의 고급 장교들 사이에서는 메이지(明治)의 번벌(藩閥) 싸움을 원류로 하는 파벌 싸움의 역사가 있었다. 1930년대 초기까지 일본 육군의 고급 간부들은 주로 두 개의 비공식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 대장과 그 맹우 마사키 진자부로(真崎甚三郎) 대장을 중심으로 하는 황도파(皇道派), 그리고 또 하나는 나가타 데쓰잔(永田鉄山) 소장을 중심으로 하는 통제파(統制派)였다.[6][7][8]
황도파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 문화를 중시했고, 물질보다 정신을 중시하였다. 특히 반공산주의이기도 했던 황도파는 소련을 공격할 필요성을 주장해 오고 있었다(북진론). 한편 통제파는 당시의 나치스 참모본부의 사상, 아울러 제1차 세계 대전으로부터의 영향이 짙었고, 중앙집권화한 경제 ・ 군사 계획(총력전 이론), 기술의 근대화 ・ 기계화를 중시하여, 중국으로의 확대를 지지하고 있었다(남진론).
아라키 사다오의 육군대신 재임 중에는 황도파가 일본 육군의 주류파가 되어, 많은 중요한 참모직을 점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아라키가 사임한 뒤 통제파 장교들로 교체되었다.[9][10]
청년장교들은 무엇을 품고 있었나
일본 육군장교는 그 학력이 육군사관학교(陸軍士官学校, 육사)에 그친 자와, 육군대학교(陸軍大学校, 육대)까지 진학한 자들 사이에 인사상의 코스가 나뉘어 있었다. 육대 출신자들은 장교단 가운데서도 엘리트 그룹을 형성했고, 육군성, 참모본부, 교육총감부(教育総監部) 같은 일본 육군의 중앙기관을 중심으로 근무하였다.[11] 반면 육대를 나오지 않은 장교들은 관례상 참모로 승진할 길이 막혀 있었고, 주로 실시부대(実施部隊)의 대부장교(隊付将校)로써 근무하였다. 엘리트 코스에서 소외된 이들 부대장교 대부분이 모여 하나의 소장파 그룹(으레 '청년장교'로 불리는데, 경찰이나 헌병대에서는 그냥 '일부 장교'로 불렸다)를 형성하기에 이르렀고, 그것은 하나의 정치적인 그룹과도 같은 것이었다.[12][13]
부대장교가 정치적인 사상을 가지고 하나의 조직을 형성하기에 이른 배경 가운데는 당시 일본 농촌 ・ 어촌의 곤궁한 실태가 포함되어 있었다. 부대장들은 징병으로 농, 어촌에서 입영해 온 병사들과 직접 접하면서 그들과 그들의 고향이 처한 곤궁한 현실을 잘 알았고, 서로가 쉽게 뭉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2.26 사건에 가담했던 다카하시 타로(당시 소위)의 사건 뒤의 옥중 수기에서, 다카하시가 보병 제3연대(歩兵第3連隊)에서 제1중대(第一中隊)의 초년병 교육계(初年兵教育係)였을 때를 회상한 였을 때를 회상하는 대목이 있다. 다카하시가 초년병에 대한 면담에서 가정 사정을 묻자, 그 병사가 "누나는..."이라고 입을 떼더니만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렸고, 다카하시는 그 병사의 누나가 자신의 몸을 팔게 되었음을 짐작하고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 초년병 조사에서 이러한 정경이 반복되는 것에 암연히 탄식하였다. 다카하시는 "먹고 살 수 있거나 없거나 가족을 뒤로 하고 국방의 최일선에 목숨을 바치러 왔으니 그 속내가 오죽할까. 이런 심정에 우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었다. 이들에게 쏟을 눈물이라는 것이 있다면, 국가의 현실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으리라. 특히 위정이라는 중직에 선 자라면"(食うや食わずの家族を後に、国防の第一線に命を致すつわもの、その心中は如何ばかりか。この心情に泣く人幾人かある。この人々に注ぐ涙があったならば、国家の現状をこのままにはして置けない筈だ。殊に為政の重職に立つ人は)이라는 글을 남겼다.[14]
또한 1933년(쇼와 8년) 11월에 일본 육군 장교 클럽인 가이코샤(偕行社)에서 황도파와 통제파, 두 파벌의 중심인물이 모여서 회담을 할 때의 일로, 통제파의 무토 아키라(武藤章) 등이
青年将校は勝手に政治運動をするな。お前らの考えている国家の改造や革新は、自分たちが省部の中心になってやっていくからやめろ
청년장교는 멋대로 정치 운동을 하지 마라. 너희가 생각하는 '국가의 개조'나 '혁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성부(省部,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중심이 되어 해 나갈 문제니까 그만두라고.
라고 주장하자, 청년장교들은 이에 다음과 같이 반박하였다.
あなた方陸大出身のエリートには農山村漁村の本当の苦しみは判らない。それは自分たち、兵隊と日夜訓練している者だけに判るのだ
너희 같은 육대 출신 엘리트들은 농·산·어촌의 진짜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오직 우리들, 병사들과 밤낮으로 훈련에 힘쓰는 자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15]
한편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 관저 습격조였던 이케다 토시히코(池田俊彦, 당시 육군 보병소위)는 습격조 여덟 명 가운데 유일하게 종신형을 언도받고 지바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는데, 그와 같은 감방에 수감되어 있던 이 가운데 조선의 독립운동가였던 박준식(박열)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준식은 이케다에게 호의적이었고, 이케다는 그에게 어떻게 해서 항일운동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는데, 박준식은 "내 고향에서는 돈을 빌려 준 (일본인) 고리대금업자에게 풍년이 들 때 찾아가 돈을 갚으려 하면 선심을 쓰면서 '안 갚아도 된다'고 돌아가게 해놓고, 형편이 어려워지면 어떻게 알고 바로 찾아가 빚을 갚으라는 독촉을 했다. 그런 식으로 자기 땅을 빼앗긴 사람들을 많이 봤고, 일본에 대한 증오를 키우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이케다 역시 박준식의 이야기에 공감하여 똑같이 분노가 치밀었다고 회고했다.[16]
이러한 농어촌의 곤궁한 상황에 대한 청년장교들의 생각에 더해, 혁명적인 국가사회주의자(国家社会主義者)였던 기타 잇키(北一輝)의 '임금 옆에 붙은 간신'(君側の奸)이라는 사상이 영향을 주었다. 기타가 저술한 《일본개조헌법대강》(日本改造法案大綱)은 그 '임금 옆에 붙은 간신'이라는 사상 아래서 임금 옆에 붙은 그 간신을 쓰러뜨리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개조안을 제시하고 있었는데, 이 책은 '우국'이라는 일념으로 한데 뭉쳐 '쇼와 유신'을 꿈꾸던 이들 청년장교의 '바이블'이나 같았다.[17]
청년장교들은 일본이 직면해 있는 수많은 문제들은 일본이 본래 지녀야 할 국체(国体)로부터 멀어진 결과라고 생각했고(여기서 '국체'란 대략 천황과 국가의 관계 형태를 의미한다) 농촌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곤궁을 초래한 원인은 '특권계급'이 사람들을 착취하고 천황을 속여 권력을 횡령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이 나라 일본을 약체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은, 이 상황을 해결할 대책은 70년전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모델로 하는 '쇼와 유신'(昭和維新)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청년장교들이 나서서 '임금 옆에 붙은 간신'을 쓰러뜨려, 다시금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를 되세워야 한다. 그뒤 천황 폐하께서 서양적인 사고방식과 사람을 착취하는 특권계급을 일소하고 국가의 번영을 회복시킬 것이다. 이러한 이들의 신념은 당시 일본의 국수주의자들, 특히 기타 잇키의 정치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었다.[18]
완만하게 연결된 청년장교 그룹은 크기가 다양했지만 도쿄권 장교들을 중심으로 정식 회원이 약 100명 정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비공식적인 리더는 니시다 미쓰기(西田税)였다. 전 육군 소위로 기타 잇키의 문하 제자였던 니시다는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에서 급증하고 있던 민간의 국수주의적인 단체의 저명한 '멘토'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일본군 안의 파벌을 '국체원리파'(国体原理派)라 불렀다. 1931년(쇼와 6년)의 3월 사건(三月事件)과 10월 사건(十月事件)에 이어 당시의 정치적 테러 대부분에 적잖이 관여했는데, 육군과 해군의 멤버들이 분열하여 이들 민간의 국수주의자들과의 관계를 청산했다.[12][19][20]
황도파와 국체원리파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는지 그 정확한 성질은 복잡하다. 이 두 파는 같은 그룹으로 묶이기도 하고, 보다 큰 그룹을 구성하는 두 개의 그룹으로 다루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당시의 멤버들의 증언이나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이 두 파벌은 현실에서 별개의 그룹이었고, 한편으로 서로 호혜적인 동맹관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황도파는 국체원리파를 은폐하면서도, 그들에게 접근을 허용하는 대가로 자파 안의 급진적인 장교들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국체원리파를 이용하고 있었다.[21][22][23]
사전 계획
사건의 전개
오래가지 못한 군사 반란
그러나 이들 군사 반란은 오래 가지 못했다. 2월 27일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28일에 천황은 원대복귀 명령을 내렸다. 반란군은 천황 친정을 쿠데타의 명분으로 삼았는데, 천황이 복귀 명령을 내리자 반란의 근거를 잃은 이들은 부사관과 병을 원대복귀하게 하고 일부는 자결하고 일부는 투항하여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처형
당시 반란 가담자들은 재판을 통해 사형 등 처벌을 받았는데, 순수 파시스트라고 불린 극우성향의 지식인[24]이자 유일한 민간인 반란 가담자였던 기타 잇키(北一輝)도 처형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성격
군국주의 성격의 군인들이 일으킨 이 쿠데타 사건은 1930년대 이후 일본이 군국주의로 가고 있었음을 말한다.
같이 보기
- 황도파
- 통제파
- 사건
- 5·15 사건
- 구국 사이타마 청년정신대사건(救国埼玉青年挺身隊事件)
- 삼무사건
- 신병대사건(神兵隊事件)
- 제1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혈맹단사건(血盟団事件)
- 인물
- 궁성 사건
각주
내용주
- ↑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사병이란 단어 대신 이들을 구별하여 부른다.
- ↑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 전후부터 정치적 이유에 의한 암살은 으레 '참간'(斬奸)으로 불렸고, 그 이유를 저술한 참간장(斬奸状)을 부치는 것이 통례였다. 오쿠보 도시미치 암살 사건(大久保利通暗殺事件) 등에도 참간장이 부쳐졌다.
출처주
- ↑ 高橋正衛『二・二六事件―「昭和維新」の思想と行動』中公新書、増補新版1994年
- ↑ 가 나 沢本孟虎 1926, 171쪽.
- ↑ 法曹会 1934.
- ↑ 帝国弁護士会 1934.
- ↑ 日本歴史めぐり・二・二六事件
- ↑ Storry (1957) p.137
- ↑ Shillony (1973) pp.37-38
- ↑ Crowley (1962) p.310
- ↑ Crowley (1962) pp.313-14.
- ↑ Storry (1957) pp.137-143
- ↑ 《2 26 jiken ga yoku wakaru hon : Shuto o shinkansaseta hanran wa naze okitanoka : 20 pointo de rikaisuru.》. Taiheiyō Sensō Kenkyūkai, 太平洋戦争研究会. Tōkyō: PHP Kenkyūjo. 2008. 92쪽. ISBN 978-4-569-66988-5. OCLC 676007660.
- ↑ 가 나 Crowley (1962) pp.311-12
- ↑ Shillony (1973) p.13
- ↑ 太平洋戦争研究会編『「2.26事件」がよくわかる本』(PHP文庫 2008年)p.166
- ↑ 太平洋戦争研究会編『「2.26事件」がよくわかる本』(PHP文庫 2008年)pp.112-113
- ↑ 池田俊彦 《生きている二・二六》 ちくま文庫, 2009, p193
- ↑ 太平洋戦争研究会編『「2.26事件」がよくわかる本』(PHP文庫 2008年)p.174
- ↑ Shillony (1973) p. x, 60, 64?68, 70
- ↑ Kita (2003) pp.13-16, 19
- ↑ Shillony (1973) p.21
- ↑ Crowley (1962) p.311
- ↑ Shillony (1973) pp.39, 55
- ↑ Kita (2003) p.19
- ↑ 안효상 (1997년 3월 31일). 《상식밖의 세계사》. 새길. ISBN 9788970331041.